불교/산 사랑

(5)설악산과 사찰(봉우리와 절)

상현/강물 2007. 10. 2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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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설악산은 남한에 있어서는 한라산,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일뿐만 아니라 그의 웅장한 모습은 우리나라 굴지의 명산이라고 할수 있다.(국립공원 지정:1970년 3월 24일) 우리나라 동해안에 치우쳐 중남부에 걸쳐 등뼈산맥을 이루고 있는 백두 대간 남북의 태백산맥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태백산맥 북쪽으로는 금강산을 솟게 하여 북한의 중첩된 산맥과 고원 지대에 통하고 남으로는 오대산,태백산을 거쳐 차령산맥, 소백산맥등이 뻗어 있다. 설악산의 주봉은 대청봉(大靑峰)으로 해발 1,708m이며 일년 가운데 다섯달은 눈에 쌓여 있으므로 설악(雪岳)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한계령

높이 1,004m. 인제~양양 간 국도가 통한다. 지역의 분수령을 이룬다. 옛날에는 소동라령(所東羅嶺)이라고 불렸으며 동해안 지역과 내륙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어왔다. 1971년 12월에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넓은 포장도로가 고개 위로 뚫려 내설악(內雪嶽) 및 외설악의 천연관광자원 개발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대청봉

해발고도 1,707.9m이다. 태백산맥에서 가장 높고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세번째로 높다. 예전에는 청봉(靑峰)·봉정(鳳頂)이라 했는데, 청봉은 창산(昌山)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봉우리가 푸르게 보인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공룡릉·화채릉·서북릉 등 설악산의 주요 능선의 출발점으로 내설악·외설악의 분기점이 되며, 천불동계곡·가야동계곡 등 설악산에 있는 대부분의 계곡이 이 곳에서 발원한다. 인근에 중청봉·소청봉이 있다.

 

봉정암

봉정암은 해발고도1,224m 지점으로, 한국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소청봉(1666m)를 지나 대청봉으로 가는 안부에는 1995년 개장한 산장이 있다. 대청봉에 오르면 일대의 모든 산군(山群)이 굽어보이며, 여기서 바라보는 동해일출(日出)이 유명하다

 

영시암

조선조의 당쟁은 때로는 나라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많은 선비들이 사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갔고, 화를 피하기 위해 첩첩산중으로 피했다. 숙종16년(1689)에 있었던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중전으로 승격되면서 정권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사건이다. 숙종의 비 민씨는 아기를 낳지 못해 늘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후궁 장ㅍ빈은 아들을 낳았고, 그아이가 원자(原子)로 책봉되었다. 장희빈을 사랑하던 숙종은 그녀를 왕비로 승격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이 반대하였고, 그래서 숙종은 이들을 숙청하고 남인을 등용했다. 희빈이 낳은 아이의 세자 책봉문제가 나오자 노론의 총수 송시열은, "임금의 보령이 이제 겨우 29세시고 중전은 23세로 아직 젊으신데, 후궁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라고 극구 반대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말을 묵살하고 그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정권을 남인에게 넘긴 것이다. 숙청된 노론 중 김수항(金壽恒)이 이었다. 그의 아들 김창흡은 어지러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를 하겠다고 암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시암이다. 그런데 이 암자를 세우지 6년이 지난 어느날 그의 하녀가 호랑이 한테 물려죽고 만다. 이후 김창흡은 암자를 떠나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혼란한 시대의 뒷면에 존재하는 슬픈 사연이다.

 

 

 

백담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진덕여왕)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계령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하였다. 690년(신문왕에 불타버려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 이때의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지금의 화천군에 비금사가 있었는데 주위의 산에 짐승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산수가 매우 부정해졌는데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이 이전과 달라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노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며,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시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려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전으로 미루어 보면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1)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다시 불타버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4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뒤 2년 만에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선구사라 하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1455년 6번재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1)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봉정암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

한용운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설악산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2007년 10월 21일 탐방시 백담사의 관광객이 많아 수대의 마을버스가 바쁘게 다녀도 탐방객이 많아 약 7.5km의 구부러진 포장된 산길을 걸어야 했다.

위 자료는 사이버 공간에서 옮겨온 글이며 개인용및 가까운 카페의 친구들과 보기위해 작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