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릉
괘릉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왕릉]
지나던 길에 괴릉 공사현장에 들렀다. 괴릉의 문화재와 관련한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적 제26호. 원형의 봉토분으로 앞에 석상(石床)을 놓았고, 아랫부분의 주위에는 다듬은 석재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그리고 호석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 길이 120㎝ 정도의 판석(板石)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갑석(甲石)을 얹었고, 각 판석 사이에는 호석이 무너지지 않도
록 지탱시키는 탱석(撑石)을 끼워 넣었으며 12지신상을 2개의 판석마다 하나씩 배치했다. 또한 호석의 바깥쪽 바닥에는
부채꼴의 판석을 정연하게 돌려 깔았으며, 봉토 주변을 둘러 석주(石柱)를 세우고 석주와 석주 사이에 2개씩 돌난간을
끼웠다. 비교적 얕게 부조한 12지신상은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들었으며, 오상(午像)만이 정면(남쪽)을 보고 있다.
또 자축인묘진사(子丑寅卯辰巳)의 6상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미신유술해(未申酉戌亥)의 5상은 왼쪽을 향하고 있다.
즉 양 측면에서 모두 오상을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는 배치를 취했다. 봉분 주위에 이렇게 12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
특유의 양식이며, 특히 괘릉의 12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또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으로 가장 잘 갖추어진 형식으로 평가되는 괘릉은 능 입구에 세워진 석상(石像)으로도 유명하다. 봉분에서 남쪽으로 약
80m 정도 떨어져서 길 양쪽에 북쪽으로부터 돌사자 2쌍, 각기 1쌍씩의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그리고 화표석
(華表石) 1쌍을 차례로 배치했다. 통일신라시대 석조물로는 그 조각수법으로 보아 극히 우수한 것으로 손꼽히며, 특히
강한 인상을 주는 무인상은 얼굴생김이나 표정, 수염 등으로 보아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것으로 판단
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국제적인 교역관계를 생각케 하는 데서 주목을 끈다.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성왕의 능은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최치원이 지은 대숭복사비문에 따르면 원래 신라 귀족 김원량(金元良)이 자신의 별장을 희사하여 곡사라는 절을 만들
었으나 원성왕이 죽으면서 장지(葬地)로 선정되어 절을 옮겼고, 경문왕 때는 능역(陵域)의 수호에 각별한 정성을 들였으며,
헌강왕 때에 와서 옮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의 괘릉 부근에는 숭복사터가 있으므로 괘릉을 원성
왕릉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