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세상은 하나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아라. 고승열전 "대각국사 의천"

상현/맑은강물 2017. 2. 19. 17:27

세상을 아름답게 보아라. "대각국사 의천"


고려시대 인물.. 제관. 대각국사 의천 .균여. 지눌. 요세. 혜심. 일연.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백운 경한. 신돈.

고려 제 11대 문종의 제 4 왕자로 1055년 9월 28일(문종 9년) 궁중에 태어나 1101년(제 15대 숙종6년)에 화연을 마쳤다. 성은 왕씨 이름은 구,자는 의천, 대각국사는 그의 시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총명하여 생이지지라는 칭찬을 받았다. 어느날 문종은 여러 형제를 불러놓고 "누가 출가하여 복전을 짓겠느냐"고 물었다. 이때 나이 11세의 어린 국사는 곧 일어나 출가의 뜻을 사뢰었다. 왕은 1065년 5월 14일 경덕국사를 내전에 불러 득도케하고 졍덕국사와 함께 영통사에서 수학케 하였다. 이어 그해 10월 불일사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경학에 전심하였다. 그는 대소승의 경.율.론 및 장소를 통달하였고 여력으로 유서 사기 및 제자백가의 학설까지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경덕국사의 입적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학인들에게 강의하였고, 그의 병성이 천하에 알려지자 문종 21년(1067)7월에는 호를 우세라 하사하고 승통의 직을 수여하였다. 그후 국사는 고려가 좁은 것을 근심하였다. 다시 말해서 보다 넓은 땅에서 많은 선지식에게 학문을 탁마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고려 국내의 인물과 학문은 거의 다 섭렵하였으니, 외유의 뜻은 학문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요구였을 것이다. 당시 외국이란 주로 요와 송을 가리킴이다. 송은 융성했던 당의 불교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선종을 위시한 각종 학문과 명승, 석학이 많았다.그리하여 송에 우학할 것을 결심하고 상선편에 부탁하여 진수정원 법사에게 편지를 보내 서로간의 예의를 닦았으며, 불교학계의 경향을 알아 보고는 유학을 결심하고, 부왕인 문종에게 허락을 간청하였으나, 승락을 받지 못하여 , 그 뚯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국사와 정원법사의 관계는 더욱더 깊어졌다. 그리하여 재차 외유를 간청하였으나 또한 그 뜻이 좌절되었다. 아마 만년의 문종은 사랑하는 왕자가 생사를 알수 없는 해로의 위험을 염려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 거란과의 국교상 문제도 고려된 것 같다. 이처럼 송유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부왕인 문종이 64세로 돌아가고 이러 백형 순종이 즉위하여 또한 돌아가고 그 후 중형인 선종이 즉위하였다. 다시 선종에게 도송의 뜻을 원하였다. 왕은 군신들을 모아 상의하였으나 역시 불응함으로 국사는 당나라 현장법사와 신라의 의상의 구법실래를 들어 간청하였지만 여전히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국사는 선종 2년 4월 왕과 태후에게 편지를 남기고 제자 수개등 두사람을 데리고 평복으로 송나라의 상인 임영의 배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를 안 선종은 어사 위 계연과 제자들을 보내어 국사를 추적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국사는 그해 5월 송의 판교진에 도착하여 입국의 뜻을 상표하였고 당시 송의 철종은 주 계원 외랑을 보내어 영접캐 하니 7월에 수도이 변경 계성사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철종은 국사를 위하여 당사의 고덕 유성법사를 추천하여 국사와 함께 교류토록 하였다. 유성은 화엄의 대가였음으로 상호 존경하였고 천태교판의 동이점을 문답하였으며 양종의 깊은 뜻을 연마하였다. 그 후 상국사에 가서 운문종 원소 종본선사를 참예하고 흥국사에서 서천삼장 천길상에게 인도의 사정과 범학을 익혔다. 월여를 지난후 서울을 떠나 항주 대중 상부사 정원법사를 뵙고 화엄. 능엄. 기신. 원각등과 천태현수의 교학을 논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종련에게는 천태교관을 영지사 원소에게는 율과 정토를 이렇게 국사는 학문의 깊이와 견문을 넓혀 갔다. 당시 송나라의 학계은 무종회창의 법관과 구대의 병화로 많은 전적들이 산일되었다. 국사는 지엄의 공목장. 화엄수현기.무성섭론소.기신론의의기등과 현수의 화엄탄현기.기신론별기. 법계무차별론소.십이문론소.삼보제장문등과 청량 . 규봉 등의 저술을 가지고 가서 함께 논의함으로써 당시의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또한 잃었던 자료가 다시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국사는 송나라에서 광법위하게 전적을 찾았으며 그동안 국사는 천태산 지자대사의 탑을 참배하고 발원문을 지어 천태교학을 고려에 선양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선종이 모후의 간절한 뜻을 받아 송나라에 국사의 귀국을 상소하였다.  국사는 원우 원년 5월 20일 귀국길에 올라 6월에 국경에 도착하여 허락없이 외유한 죄를 사뢰었으나 오히려 예성강에 이르니 왕은 태후를 모시고 봉은사까지 나와 성대한 환영을 하였다. 14개월이란 짦은 기간동안이지만 국사는 실로 50여명의 고덕을 심방하여 화엄과 천태.정토.선.율.등의 모든 학문을 쌓았으며 장소삼천여권을 가지고 왔다. 귀국후 십이년만에 낙승된 이천 팔백간의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학의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특히 송의 정원에게는 금서 화엄경과 이것을 봉안할 장경각을 건축할 금 2천냥을 보내니 정원은 경각을 건립하고 이 경을 봉안하니 혜인원은 속칭 고려사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국사는 요.송.일본등지에서 구한 4천여권의 장소를 간행하려고 국왕에 청원하여 흥왕사에 교장사를 설치하고 출판을 시작하여 그의 목록이 신편제종교장총록 세권을 작성하였다. 선종 11년 (1094)에는 해인사에 내려가 은거하고자 하였으나 다시 흥왕사에 올라와 강학을 하였고 숙종 2년에는 국청사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일종으로 완성하니 왕은 거국적인 축하를 위하여 일천여 고승을 운집하여 경찬도량을 베풀기도 하였다. 숙종 6년(1101) 10월 5일 홀연히 시적하였다. 참으로 국사는 원효스님를 존경한 나머지 효승 또는 보살이라고까지 높이면서 민족사상을 창도하였고 주전론을 주장하여 국가경제를 염려하였으며 47세(법랍 36세)의 짧은 생애를 통하여 고려 문화의 창조와 불교 발전에 끼친 큰 업적은 영원히 역사에 빛날 것이다.


대각국사 의천 초상.[선암사에 있는 보물.]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바로가기 http://www.선암사.org/

조계산 바로가기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1571

고승열전 "대각국사 의천" 중 일부 1,,약 25분임.


고승열전 "대각국사 의천" 중 일부 2,,약 25분임.


불교방송국에서 오래전에 방송된 이경애극본 박용기연출 입체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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