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산 사랑

천성산

상현/맑은강물 2008. 4. 27. 21:31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과 상북면, 하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원적산이라고도 한다. 태백산계에 속하며,

남서쪽에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있는 산을 원효산(元曉山)이라 하였는데, 양산시에서 이전의 원효산을 천성산

주봉(主峰)으로 하고, 이전의 천성산(812m)을 천성산 제2봉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나무 이정표에는 예전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1,000명의 승려를 《화엄경(華嚴經)》으로 교화하여 모두 성인으

로 만들었다는 전설에서 '천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많은 계곡과 폭포 및 뛰어난 경치로 인해 예로부터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불렀다. 양산시 중앙부를 남북으로 뻗은 정족산(鼎足山) 줄기의 지맥에 해당하는데,

이 산줄기에 따라 양산시가 동·서로 갈리며, 회야강(回夜江)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가지산, 운문산, 신불산, 영축산과

함께 영남알프스 산군에 속한다. 원효암을 비롯하여 홍룡사(虹龍寺)·성불사(成佛寺)·혈수폭포(血水瀑布) 등의 명승지

가 산재한다. 제2봉의 북서쪽 사면(하북면 용연리)에는 통도사(通度寺)의 말사(末寺)인 내원사(內院寺)가 있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만산홍을 이루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화엄늪과 밀밭늪은 희귀한 꽃과 식물

(끈끈이 주걱)등 곤충들의 생태가 아직 잘 보존되어 있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태계의 보고이며,

천성산 산나물은 예부터 임금님의 수라상에 진상할 정도로 그 맛이 일품이며, 가을이면 긴 억새가 온산을 뒤덮어 환상

의 등산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희귀한 꽃과 식물·곤충들의 생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화엄늪과 밀밭늪은 생태학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가을에는 울창

한 억새밭이 장관을 이룬다. 특히 산 정상은 동해의 일출을 가장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양산시 상북면 대석에서 화엄벌에 올라오니 해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화엄벌 양산의 불광산 척판암에 주석하던 원효스님이 멀리 중국 태화사에 소반을 날려 1천명의 대중을 구했다는 ‘

척판구중’ 설화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곳이다.

원효스님을 찾아 멀리 중국에서 건너온 1천명의 대중인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양산 내원사 골짜기. 이곳에서

토굴을 짓고 살았던 이들에게 양식이 문제가 되자 원효스님이 마을로 내려가 “당나라 1천 대중이 법문을 들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먹을 양식이 부족하다” 하시고 양식을 해결한 후 금정산 원효암으로 가 수행에 전념했다.

이후 1천 대중이 스님을 찾아 법문을 청하였으나 원효암이 너무 좁아 바로 이 북문 광장에 천막을 치고 야단법석을

열었다는 것이다.

 화엄벌에서본 가지산쪽의 산하.. 

 천성산의 정상은 군사보호(지레매설 예상구역)구역이라서 일반인은 접근할 수없습니다.

 정상도 아님 장소에 천성산 표지가 있습니다.

 천성산 제2봉(비로봉)이 보인다.

 천성산 제 2봉. 비로봉에서본 아름다운 우리산하..

 

 

 

 

 원효암이 초라하여 새로운 요사체를 신축하고 있다.

 

 

 

 약사여래봉은 108계단을 통해 참배객에게만 개방하고 있다.

 

 

  홍룡사 아래 사진.  경남 양산시 상북면 전화 055) 374-4177 성보문화재 8개가 있다.

 노련한 산꾼들은 산 이름만 들어도 산세를 가늠한다. 옛 선조들이 산의 지형이나 산에 얽힌 역사적 사실에 따라

산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불교 문화권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받아온 우리네 땅에는 자연, 절집 냄새가 스민 산

이름이 많다. 이런 산은 대개 큰 절이 자리하고 고승에 얽힌 설화도 남아 있다.

산세로 보자면 절이 많은 산은 깊기도 하지만 물도 풍부하고 품 또한 넉넉하다.

홍룡사는 ‘천명의 성인이 나툰’ 천성산 계곡에 앉아 있다. 산 주변에는 신라 고찰인 통도사와 내원사가 있지만,

한곳은 조계종 교구본사라는 점 때문에 다른 한곳은 비구니 수행도량이라는 점 때문에 시민들의 발길이 쉬 머물지

못한다. 반면 홍룡사에는 불자나 일반시민 모두 세속의 짊을 잠시 벗고서 머물 수 있는 삶의 여백이 있어 좋다.

‘물이 떨어지며 피어나는 무지개’로 풀이되는 ‘홍룡사’에 가면 염리심(厭離心)이 절로 난다.

‘깨달음(佛)을 챙긴다(念)’라는 선(禪)의 의미보다는 그저 마음이 가라앉고 고요한 평안을 느끼는 상태,

다시말해 ‘세속의 흐름에 들뜨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염리심에 감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재단법인 선학원(禪學院)에 속하는 홍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661~681) 원효(元曉)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경내 위쪽 협곡에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듯 신비롭게 느껴지는 홍룡폭포가 숨어 있다.

 

 

홍룡폭포는 제1폭포와 제2폭포가 있는데, 옛날 천룡(天龍)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폭포는 삼층 비류가 흘러내리는데 상층은 높이가 80척이요, 중층은 46척,

하층은 33척으로 되어 있다. 깎아 세운 듯한 바위가 위풍당당하고 흐르는 물의 기세는 하얀 눈과 같아서

그 풍광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수량이 많고 맑은 날이면 폭포 상단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면서 환상적인 모습은 더할나위 없는 천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홍룡사 아래쪽은 수량이 풍부한 골짜기 다섯 가닥이 모여 물도 넉넉하고, 곳곳에

너럭바위가 널려 있을 뿐 아니라 숲도 적당히 우거져 있는 등 계곡 풍광 또한 뛰어나 여름철이면 물놀이

피서객들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명(寺名)에서 터에 이르기까지 물과 깊게 관련되어 있는 홍룡사는, 그래서 관음도량이다.

폭포 옆으로 백의관음이 봉안된 관음전이 있고, 선방으로 이용하고 있는 무설전에는 천수천안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홍룡사의 관음보살 중에는 폭포에 현현(顯現)한다는 낭견관음보살도 있다고 하는데, 1천여년 동안 감로수를

쏟아낸 폭포와 인접한 곳에 관음도량이 들어선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사다리는 폭포의 찬물에 스님들이 들어가는 사다리 동전도 건져올리기도 합니다..

 

 새로지은 요사체 그리고 아래사진은 불상임니다.,,

 

 

 

 

 산사를 내려올때도 물래방아는 돌아가고 있었다..

 

참배객및 등산인을 위한 홍룡사 주위 관람 포인트

 절보다 더 유명한 홍룡폭포는 매우 아름다운 구조를 하고 있다. 높이가 20m나 되며, 항상 무지개가 영롱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나 아직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한적하고 때묻지 않은 자연미를 감상할

수가 있다. 상중하 3단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물보라를 만들며 사방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무지개까지 만들어

놓는다. 이 무지개는 그 형상이 선녀가 춤추는 듯 하고 황룡이 승천하는 것 같다하여  홍룡(虹瀧)폭포라 이름한다.

 

홍룡폭포 와 나란히 위치한 곳에 홍룡사의 관음전이 있다. 이 관음전에는 백의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는데 전각

 내부에 앉아 살며시 눈을 감아보자. 쏟아져 내리는 폭포소리가 속세에 지친 마음을 차분히 씻어준다.

 

홍룡사 주차장 위쪽 산길은 활엽수림이 적당히 우거져 호젓한 골짜기를 40분쯤 오르면 급경사 사면길로 올라붙

는다. 장딴지가 당길 정도로 가파른 사면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산길은 서서히 왼쪽으로 틀어져 올라 붙다가

원효암 오른쪽(동쪽) 산길과 이어진다. 홍룡사에서 출발해서 원효산 화엄벌을 거쳐 홍룡사로 돌아오는 코스는

오르는데 2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하산은 1시간 정도 소요됨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천성산 산행이 이어지는 홍룡사 순례길은 더딘 발걸음에도 꽉찬 여행코스를 만들어 주는 아주좋은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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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생애(불교 관련자료)

원효(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이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새벽을 열어간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다.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나던 이무렵 신라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있었다. 원효가 그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뒷날 佛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불교학은 물론 유가(儒家)와 도가자(道家者)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들에서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원효의 행석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입당(入唐) 유학을 시도했던 그가 문득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는 34세때 당에 유학하기 위해 의상(義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꾼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45세에 다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해서 당(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唐州界)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이어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다. 원효의 이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토리 자체보다도 이 신라인의 주체성, 그리고 이로부터 확장해간 그 사상적 보편성과 세계성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열렬하게 유학의 꿈을 품어 온 원효가 한 순간에 전회(轉回)하여 신라로 돌아온 후, 그는 오직 불교학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여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구 범위도 대·소승불교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가히 넓고 깊은 學解와 초인적 저술활동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 석학들까지도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저술은 19부 22권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는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저술배경에 일화도 많은 「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중심 개념인「화쟁」을 풀이한「십문화쟁론」 등은 다행이 남아있다. 그리고 원효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연구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소」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기신론」는「금강경」「원각경」「능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전인 사교과에 속하는 논서이다. 마명의 저작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않고 산스크리트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채 한역본만 유통되고있다. 그 내용은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등 모든 면에서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대승기신론」은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을 지향, 화합시켜「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일여),「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는 사상을 나타낸 논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현실세계(속)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완성된 인격(진)을 이룩할수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진속일여」,「염정불이」의 사상이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을 대하자마자 스스로의 삶과 학문의 목표와 너무나 맞아떨어짐에 감명을 받아 기존의 논의에관한 9종의 연구서를 내 놓았다. 그 가운데서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권)이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가나 종파를 초월하여 널리 유포된「대승기신론」에 관해서는 수백여종의 주석서들이 나와있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기신론삼소」라 일컫는다. 중국 정영사의 혜원(서기 523∼592)의 주석서인「정영소」, 신라의 원효대사의 주석서인 소위「해동소」, 그리고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서기 643∼712)의「현수소」가 곧 그것이다.
기신론의 3소 중에서도 원효의 「해동소」는 혜원의 「정영소」를 그 내용에 있어 단연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기신론」주석의 백미라 일컫는 법장의 「현수소」는「해동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면도 적지가 않다. 요컨대「현수소」는「해동소」가 있어서 비로소 그를 토대로 저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징관이 스승 법장으로부터「해동기신소의」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음을「송고승전」도 밝히고 있다.
원효는 젊은 시절에 도당유학을 단념하고 국내에 머물었으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과 같이 그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그러나 교학연구나 관념적인 사상 속에만 머물러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소용돌이치는 한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는 왕실·귀족불교도 인도해야 할 대상이었고, 더구나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그리고 정복지역의 유민들도 다같이 뜨겁게 안아야 할 이 땅의 가엾은 중생들이었다. 원효가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궁의 공주와 짧은 인연으로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 채 小姓居士라 자처한 일은 분명 놀라운 파격이었다. 그러나 이를 겉에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만만치가 않다.
염정불이 진속일여(染淨不二·眞俗一如)는 그의 학문적 이론이자 종교적 실천의 기초이다.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니고 진리의 길과 세속의 길이 본래 같다는 이해는, 진리의 근원인 우리들 一心의 통찰에서부터 나온다. 이미 그것을 확연하게 깨달은 원효에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무의미했을 터이다. 그는 聖과 俗을 一心으로 아우르고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원효는 더욱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큰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승려들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지방의 촌락이며 시장거리며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무애가-무애가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일도출생사」(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다번에 생사를 벗어 나리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노래이다.-를 지어부르고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불법을 설법하는 교화작업에 힘썼다. 누가 그런 기이한 행색의 원효를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학승이며 왕실에서도 존경받는 고승이라 생각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그런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다. 그들은 가슴 절절히 와닿는 생기를 얻었으며, 염불을 따라부르며 정토에 때어날 희망을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의 만년에 대해서는 역시 자세한 자료가 없다. 다만 보살행(菩薩行)으로써 민중교화행을 마친 그는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성사로 되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신문왕 6년(686) 3월 30일의 일이었다.
자주적인 가성인이자 위대한 사상가로서, 성속(聖俗)을 넘나든 자유인이자 민중의 구제자로서 원효는 그의 70년 생애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다가 갔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국사상사의 첫 새벽을 환하게 열어 놓은 원효는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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