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경전, 요약

세상을 아름답게 보아라. 절과 하심

상현/맑은강물 2023. 12. 24. 03:26

절과 하심

절(사찰)을 왜 절이라 할까요, 누구는 신라의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모례내 집의 모가 털모(毛)자라고 할 때 “털례의 집에서 ”털“의 음운변화를 하여 ‘절”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역사적 근거와 말의 근원을 관련하여 분석하기도 합니다. 누구는 절에 가면 절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절이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누구는 소금에 배추를 절이면 배추 숨이 죽듯이 절은 절을 찾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상을 절이기 때문에 절이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그렇 듯한 말 가운데 소금에 배추를 절이듯이 여러 가지 상을 절이고 자신을 낮추게 한다는 의미에서 “절”이라고 한다고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리고 “절”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절”이라고 한다는 말도 똑 같은 가르침이라고 이해됩니다. 하심은 자기를 낮추어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고 자성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속에 있는 무한한 공덕과 복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부처님으로 생각하여 존경하거나. 불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거룩하게 받드는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심은 도에 나아가는 수행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삶에서 항상 새겨 보라는 가르침은 절 곳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우선 하마비, 절 초입에 있는 표지 석으로. 말에서 내리라는 뜻입니다. 말을 타고 온 지체 높으신 분도 여기서는 내려서 직접 걸어서 들어가야 합니다. 아상의 말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계단의 경사가 굉장히 높은 법당도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 장경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그렇고 경주 불국사 관음전에 올라가는 계단이 그렇습니다. 감히 고개를 처 들고 거들먹거리면서 올라가거나 내려올 수 없습니다. 또한 법당 마당에 들어서기 전 천장이 다소 낮은 누각 맡 역시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리고 합장하는 순간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순간 자신을 나추고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일입니다.

일상 신행생활에서 언급하는 보시도 “나를 낮추는 나를 버리는”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가 제일 먼저 있는 것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결코 보시를 할 수 없습니다. 교만과 인색 그 바탕은 똑같은 나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있으니 교만하고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으니 인색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반대로 보시를 통해. 나눔을 통해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 나가자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는 공부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백일기도든 3-7기도(21)든 기간을 정해서 기도를 할 때. 매일 매일 천 원씩 모아보세요. 기도 끝났을 때. 모은 돈을 절의 불전 함에 넣거나 불사에 보태거나 주위의 사회단체에 기부해 보세요. 그때. 모은 돈을 어디에 보시하고자하는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세요. 그 순간에도 계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릅니다. 그 마음을 살펴보는 것, 또한 공부입니다.  목경찬 교수의 글에서